Q1. 3년 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한 권의 시집을 묶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을 텐데도, 이번 시집을 읽으며 선생님께서 한 시절을 건너왔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세번째 시집을 출간하는 소회가 어떠신가요?
등단한 지 17년이 되었네요. 지금껏 7년에 한 권씩 두 권의 시집을 냈는데요. 이 시집을 묶으면서 보낸 3년은 뭐랄까. 제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이었어요. 개인적으로 부침이 많았고요. 그 어느 때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치밀하게 질문했던 시기였어요. 편집자님께 삼교지를 보내고 나서, ‘재밌네. 실컷 헤맸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놀랐는데요. 패자의 해방감이랄까요. 시와 질기게 붙고, 흠씬 두들겨 맞고 나가떨어진 뒤의 후련함이랄지...... 그런 게 있었어요. 시를 쓰면서 ‘어떤 성과를 바라거나, 겨루는 마음에서 이제 좀 가볍고 싶다’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묵묵히 쓸 수 있는 시를 쓰자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시원한 감정이 들었던 시집은 처음입니다.
Q2. 이번 시집의 제목은 ‘백장미의 창백’입니다. 첫번째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와 두번째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이후 처음으로 명사구 제목을 시도하셨어요. 「백장미의 창백」은 이번 시집의 서시이자 표제시이기도 한데요. 이 제목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는지 여쭈고 싶어요.
‘순백’이 순수를 추구하는 세계라고 가정한다면, ‘창백’은 핏기 없이 푸른 기가 도는 ‘불길한 징조’나 ‘태어나려는 예감’과도 같아요.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지만, 글쎄요. 세상은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요? 아름다워서 슬프고,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운 신비로 일렁여요. 가까운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산책하다가 겪은 일인데요. 근방에서 매미가 귀가 찢어질 듯이 우는 거예요. 나무를 올려다보니 귀여운 새가 앉아 있었어요. 새가 매미의 몸통을 쪼고 있더군요. 매미가 울면 위치가 파악되어 천적에게 들키기 쉬울 텐데요. 그런데도 매미는 맹렬하게 울어요. 이를 자연의 순환이라 이름 붙이는 것이, 기이하고 묘한 질서 같아요.
만약 ‘순백’의 시를 쓴다면 귀여운 새를 노래하는 시를 썼겠죠. 하지만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매미는 죽고 껍질이 하얗게 말라가도 그 울음을 추모하는 일에 ‘창백’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어떨까요.
Q3. 삶과 죽음에 대한 시편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시의 화자는 그러한 두 세계를 잇는 매개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순리에 대해 평소에 품고 계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아버지와 반려묘의 임종을 지켰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눈꺼풀을 내려주던 순간. 차가워진 이마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장례를 치르고 어떤 날은 무궁화를 보며 걸었고, 어떤 날은 땡볕에 말라 죽은 지렁이를 보며 걸었어요. 홀린 듯이 죽음에 대해 몰입했던 시간이었어요. 그간 목도했던 사회적 참사도 그 어느 때보다 뼈아픈 질문으로 다가왔어요. ‘삶의 끝은 정말 아무것도 없나?’라는 질문을 쥐고, 싸우듯이 답을 구하고 싶었어요. 누군가는 샤먼과 문학, 사람들 사이에 인생의 답이 있다고 말할지도 몰라요. 저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죽음은 완벽한 단독자가 되는 일이니까요. 연결되었던 세계의 끈이 툭 끊어지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엉성하더라도 그 매듭을 잇는 일을 시로써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일이 조금이나마 망자들을 덜 외롭게 하고, 무릎이 꺾인 채 살아가는 이들을 부축하는 일이라면요.
Q4. “언어의 안팎을 뒤집어 다시”(「비유로서의 광수 아버지」) 쓰겠다는 대목에서 언어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시인의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언어를 의심하면서도 언어에 기대어 쓴, 그리하여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들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언어야말로 인류의 가장 강력한 무기잖아요. 세계 질서를 재편하고, 정치 수단으로 폭력을 강화하거나, 다른 종을 지배하죠. 우리는 언어를 고도화된 문명의 도구처럼 사용하지만, 역으로 인간이 다른 종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요.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생하는 생물이야말로 고등 생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인과를 홀딱 뒤집어보고 싶었어요. 지금껏 언어로 대상을 이용해온 것, 비유하거나 은유하는 인간의 말로부터 탈주하고 싶었거든요. 인간의 ‘말’이 중심인 세계를 회전시켜 경계 없는 세계를 재건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장은영 평론가님이 ‘말을 모르는 너에게’라는 해설 제목을 붙여주셨을 때, 고마웠습니다. 언어 안에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지만요.
Q5. 수록작 중 유독 마음에 남는 시가 있으실까요? 그 이유도 듣고 싶습니다.
4부에 실린 장시 「꼭두전」입니다. 정신이 마구 달려가고, 손이 허겁지겁 따라가는 시를 쓸 때가 있어요. 그런 경험은 드물게 오는데요. 한달음에 휘몰아치듯 신나게 썼어요. 다 쓰고 나니, ‘시가 예상치 못한 곳에 나를 부려놨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인식 밖의 영역, 비이성적이라고 선을 그은 정황이나 인물을 시 안으로 데려오는 경험도 신비로웠고요. 퍽 재밌었습니다. 우리가 명확하다고 믿는 인식 안쪽의 세계는 과연 공고할까요? 저는 무의식의 무궁한 의심 속에서도 시가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호명되지 못한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시 안으로 불러들여, 한판 놀게 하고 싶었어요. 언어로 한 상, 진설을 차려서요. 거기에 윤리적 당위나 인간의 도덕성을 강요하는 시를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 것은 정치가 할 일이죠. 시는 오히려 ‘자연’에 가까운 얼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