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4년 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저에게 이번 시집은 ‘빛 쪽으로 가기’ ‘구하기’ ‘포기하지 않기’ ‘계속 걷기’를 다짐하는 시집으로 읽혔는데요, 시들을 정리하며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여름 언덕에서 내려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몰두했던 한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는데, 그다음 행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일단 걸었습니다. 목적지를 상정하기보다는 ‘걷기’ 자체에 집중하면서요. 그렇게 4년이 흘렀습니다. 무감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계절이 남긴 것들을 한 다발로 묶고 나니 오늘이네요. 꽃 없는 꽃다발을 들고 어둠 속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를 쓰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잃었어요. 스스로 삶을 져버린 경우가 많았고요. 그래서 저로서는 무척 절박했던 것 같아요. 삶은 굉장하다고, 상상 이상의 반짝임과 일렁임으로 가득하다고, 그러니 반드시 살아 있어달라고. 우리는 누구나 존재의 초과와 부족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그 여파는 무척 거셀 테지만, 그럼에도 그 중압감에 매몰되지 말고 생의 감각, 생의 의지를 일깨우고 싶다는 염원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던 시기였어요. 그러려면 제가 단단해져야 했습니다. 밧줄을 잡아당기려면 악력을 키워야 했어요. 한 사람은 어떻게 두 사람인가. 너를 구하는 일이 왜 나를 구하는 일인가. 이 문장들을 부적처럼 붙들고 있었습니다.
Q2. 제목인 ‘당근밭 걷기’가 인상적입니다. 이 제목을 고른 이유와, 이 제목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름 언덕 지나 이제는 당근밭을 걷는다는, 이전 시집과의 연결성이 우선 좋았습니다. 읽었을 때 공간이 열리는 제목이라는 게 좋았어요. 왜 하필 당근이냐 묻는다면, 만일 당신 영혼의 채소(?)가 푸성귀라면, ‘푸성귀밭 걷기’로 고쳐 읽어도 무관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 말인즉, 중요한 건 당근이 아니라 이 세계가 애정을 가지고 길러낸 것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소유했는지도 모르는 땅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 그곳에서 무언가 자라고 있다는 것, 피가 돌고 있다는 것…… 그것을 실감할 때가 삶의 인력이 강하게 작용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제게는 꼭 당근이어야 할 이유가 있었어요. 흙 묻은 당근을 보면 마음이 슬프면서도 좋아요. 색도 매력적이고, 무르지 않고 단단하다는 점도 닮고 싶죠. 자라느라 얼마나 어두웠을까. 나의 식탁에 도착하기까지 몇 겹의 시간을 건너왔을까. 당근이 지닌 우주적 기운을 느낄 때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뭉클해집니다. 제가 얼마나 커다란 흐름 속에 자리해 있는지를 깨닫게 돼요.
Q3. 시 속에 여러 식물과 열매가 등장합니다. 돌과 새, 물과 불도 눈에 띄고요. 작가님의 마음을 흔드는 존재들에 대해 들려주세요.
이번 시집 화자에게 ‘생명력 전개’에 대해 물어보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라는 대답을 할 겁니다. 직전 시집에서 시인의 말을 빌려 “생활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화자거든요. 겁이 많긴 하지만 관계를 향해 조금씩 걸어나가고 있으며, 입김을 불어넣어 면적을 넓히듯 발화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관계를 확장해나가고 있는 사람이지요.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은 애틋합니다. 내가 볼 때, 나를 보는 것들이 있어요. 내가 보려 하지 않아도 계속 나를 지켜봐주는 것들이요. 제게는 특히 나무나 돌이 그런 존재로 인식됩니다. 나무나 돌은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잖아요. 비슷한 모양은 있을 수 있어도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죠. 죽은 것처럼 보여도 살아 있고, 말없이도 말하고, 이목구비 없이도 표정을 지을 줄 알죠. 그런 점이 저를 계속 상상으로 이끄는 것 같아요. 특히 시집 2부에 식물 시편들을 연달아 배치하면서 하나의 큰 흐름이 만들어지기를 바랐는데요, 가끔은 인간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나무나 돌이 줄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들은 제 안에서 물결을 만듭니다. 계속 시를 쓰게 만들어요.
Q4. 수록작 중 유독 마음에 남는 시가 있으실까요? 그 이유도 들려주세요.
시집 마지막에 자리한 「굉장한 삶」이라는 시를 꼽고 싶네요. 시집 제목으로도 고려했을 만큼 마음이 가는 시입니다. 시에 등장하는 ‘신기’와 ‘신비’는 언뜻 보기에 비슷한 단어 같지만 생각해보면 무척 달라요. 무언가를 신기하다고 말할 때는 팔짱을 끼고 멀찌감치 서 있지만 무언가를 신비롭다고 말할 때는 상체를 기울여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삶은 신기한 걸까요, 신비한 걸까요? 저는 우리가 삶을 향해 상체를 기울여봤으면 좋겠어요. 거기 뭐가 있는지 봐야죠. 생각보다 굉장한 것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Q5. 이 시집을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려요.
제가 썼지만, 이제부터의 시는 제 것이 아니에요. 바통을 넘깁니다. 제가 계속 써내려가는 이유는 저기 저 반대편에서, 제 시를 만나러 와줄 당신 삶의 구체성과 진실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궤도를 떠돌던 우리가 어느 순간 포개진다면, 그건 모두 시의 일. 그것 보세요, 당신과 내가 시의 복판에서 만났잖아요. 이보다 굉장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