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김진화
<여름이 오기 전에>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어린이들이 읽을 책에 그림을 그려 오셨는데, 쓰고 그린 창작그림책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조금은 특별한 소감이 있으실 것도 같은데, 어떠신가요?
아닌 척했지만 너무 행복합니다. 내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어요. 그림만 그릴 때는 잘라 내자, 덧붙이자, 의견도 많이 냈는데 제 글은 고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제가 오만했어요. 겸손했어야 해요. 이 모든 과정을 한 발 한 발 밟으며 창작을 해 나가는 동료 작가들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여름이 온다는 기분에 조금은 급하게 떠난 여행에서, 같이 갔던 애착의 대상 ‘길쭉이’를 잃어버리면서 시작돼요. 선생님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로 알고 있어요. 어떤 계기로 이 그림책을 구상하셨는지 궁금해요.
길쭉이라는 인형은 단지 기다래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됐는데, 길쭉이는 제 아이가 가는 곳 어디든 함께 다녔어요.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일입니다. 외출 가방을 쌀 때 길쭉이는 너무 커다란 짐이었지만 길쭉이 없이는 다른 짐은 다 무용지물이었으니 언제나 일순위였다고 할 수 있지요. 꼬리나 귀가 닳아 없어지기 시작해서 새로 떠 입히고 덧씌우기를 네 번이나 했는데, 그동안 몇 번 잃어버렸다 다시 찾기도 했어요.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닳고 닳은 길쭉이를 보면 한없이 사랑받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을 갈 때마다 뭔가를 챙기느라 항상 정신이 없었던 저는 여행도 숙제처럼 해내곤 했던 것 같아요. 아이가 잠들고 나면 그제야 파도 소리가 들려왔지요. 와 바다다… 하면서요. 그런 저의 여행, 아이의 여행, 길쭉이의 여행이 모두 담긴 이야기예요.
사진 제공 ⓒ김진화
부드럽게 번지는 질감과 사랑스러운 색채들, 순간순간 다 다른 여름의 물빛이 정말 인상적인 그림책입니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끊임없이 감탄이 번져요. 그림 작업을 하시면서 어떤 부분에 가장 힘을 쏟으셨나요?
여름에 더 투명한 공기, 그걸 그리고 싶었어요. 사물의 그림자마저도 투명한, 빛이 온통 산란하는 여름의 기분. 울음을 살짝 참는 것 같은 기분을 표현하려 애썼어요. 내 마음보다 너무 앞서지 않게 그리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 보니 조금 소심했나 하는 장면들도 있었어요. 여름 하면 떠오르는 소나기 같은 요란함, 인파 속의 부산함, 시원함이나 달콤함도 좋지만 저는 독자들의 감정을 조금씩 장면에 잡아 두고 싶었어요. 선선한 초록, 투명한 노랑에 공들였어요. 한쪽 눈을 감고 바라보는 풍경같이 느껴지면 좋겠어요.
사진 제공 ⓒ김진화
마음에 특히 각별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나요?
길쭉이가 세탁차에 실려 가는, 오름이 있는 장면과 혼자 숲 사이로 난 도로를 걸어가는 장면을 꼽고 싶어요. 이 두 장면은 처음 스케치부터 완성까지 변한 게 거의 없는, 저에게 가장 영감을 많이 준 장면이에요. 오름은 제주도를 특징 짓는 지형이잖아요. 그 구릉진 형태를 볼 때마다 여러 이야기들이 떠올라요. 또 길고 깜깜한 숲을 홀로 걸어오르는 길쭉이를 떠올리면 왠지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만 같아요. 막막한 산길이지만 유쾌한 기분으로. 힘든 줄도 모르고 나에게로 오는 중이라고 상상하고 싶죠. 그림 곳곳에 길이 많이 등장해요. 갈림길 앞에 선 길쭉이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요? 공항까지 무사히 오게 될까요? 우리의 삶은 많은 길이 교차하며 생겨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가 해요.
<여름이 오기 전에>는 나와 길쭉이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우리 삶의 시간들 속에서 유난히 뭉클하게 반짝이는 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인 것도 같아요. <여름이 오기 전에>를 완성하기까지의 시간도 선생님의 어떤 시절이었을 텐데요. 어떤 것이 그대로이고 어떤 것이 변했을까요?
그림책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여름은 반짝이는 윤슬 같은 시간이에요. 지난 여름들 속에는 사랑하는 이가 내게 건넸던 말처럼 순간순간 빛나는 기억들이 있고, 무언가와 작별하고 새로 만나고 또 기억하던 순간들이 있지요. 그런 여름들을 생각하면서, 또 새로 맞이할 여름은 처음 맞은 계절처럼 또 단단하게 사는 거죠. 여름을 앞두고 기다리는 마음, 점점 사라져 가는 그날의 냄새, 여전히 그날 그곳에 남아 있는 웃음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것 같아요.